※ 이 글은 2023년에 다녀온 여행을 바탕으로 작성된 기록입니다.
겨울 날씨인 북부지방에서 여행을 시작해 한 달 정도 걸려서 남부지방까지 내려올 일정이었다. 후쿠오카 같은 남쪽 도시로 내려올 때 쯤에는 봄 날씨가 되어 있을 터. 짐싸기가 참 애매했다. 예전에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다녀온 친구는 체중의 10분의 1로 가방 무게를 맞추기를 권유했다. 특히 걸어다닐 일정이 많다면 더욱이 짐이 가벼운 게 좋을 거라고. 그럼 대충 7킬로 이내로 짐을 맞춰야 하는 건데.
겨울 옷, 봄 옷, 수영복까지 챙겼다가 무게가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옷을 최대한 간추렸다. 부피가 두꺼운 겨울옷을 여러 벌 챙기기 보다는 목도리, 귀마개, 히트택 같은 보온 장비를 선택했다. 옷은 필요하면 더 사면 되니까. 그래도 가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행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챙겨간 고프로 장비들, 그리고 논문 작업을 위한 노트북까지. 예상은 했지만, 7키로는 못 맞췄다.


여차저차 하다보니 큰 백팩, 작은 배낭, 크로스백까지 챙겨버렸다. 그냥 캐리어를 가져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여행의 행선지도, 이동수단도 불확실한 상황이었기에 기동성이 매우 중요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집을 나섰다.
집 바로 앞에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어 편하게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도착해서 백팩의 무게를 재보니 10kg 정도가 나왔다. 작은 가방까지 하면 15kg 정도 되려나. 분명히 무거워서 후회할 걸 알았지만 최대한으로 줄인 짐이라 어쩔 수는 없다. 무거우면 좀 버리지 뭐.


여행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보니 짐도 싸다 말고 계획도 짜다만 느낌으로 비행기에 올라탄 것 같다. 시작이 분완전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가 뜨기까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이 느낌은 설렘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래서 무계획은 늘 내 계획의 일부다.

눈의 도시 삿포로가 이번 여행의 첫 행선지가 되었다. 처음에 일본 종단여행을 마음 먹었을 때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면 일정 상 삿포로에 도착할 때가 되면 눈이 다 녹아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북쪽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오는 코스로 정하게 된 것이다.
삿포로는 가족들끼리 1~2년에 한번씩 스키를 타러 방문하는 곳이라 어느정도 익숙한 도시였다. 그래서 삿포로 시내나, 필수 관광 코스인 오타루는 건너 뛰고, 도심을 벗어난 근교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된다면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었으나, 홋카이도 북쪽으로는 자동차가 없으면 이동이 힘든 곳들이 많았다. 그래서 하루 정도만 렌트카를 빌려 근교 드라이브를 하고, 남은 일정은 JR패스를 활용해서 하코다테 같은 홋카이도 남쪽 지역을 둘러볼 예정이었다. 특히 하코다테는 기대가 많이 됐다. 일반적으로 여행 코스에는 잘 포함이 되지 않는 곳이어서 사람이 없는 조용한 관광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 3~4일차 쯤에는 하코다테에 도착해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 봄이 찾아올 무렵, 그렇게 나는 설국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몇 가지 할일이 있었다. 먼저, JR패스 교환권을 티켓과 교환해야 했다. 3주짜리 티켓이 대략 60만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지역별로 이동이 잦다면 무조건 JR패스를 구입하는 게 이득일 것이라 생각했다. 공항 지하1층에 위한 JR 인포 센터에 도착해서 창구 직원한테 어눌한 일본어로 인사를 하고 여권을 건넸다. 직원은 여권을 확인하자마자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해줬다. "표 언제부터 쓰실거에요?" 지금 표를 개시하면 공항에서 삿포로 시내로 가는 열차를 무임으로 탈 수 있어서 곧바로 개시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직원은 티켓을 건네주며 나에게 절대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디지털 티켓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나 싶다.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내가 초등학교 때나 쓰던 종이 티켓을 건네받았다.

다시 돌이켜보건데, JR패스를 구입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삿포로역까지 거의 만원 정도 드는데(지정석을 선택하면 2만원), JR패스만 있으면 지정석을 예약해서 편하게 갈 수 있다.
인포 센터를 벗어나 이번엔 종이 지도를 찾아 다녔다. 나름 배낭여행이기도 하고, 일본 전역을 돌아본다는 생각에 종이지도를 보면서 행선지를 정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어릴 때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놀던 포켓몬 게임의 컨셉과 비슷하게, 모험을 하면서 도착하는 새로운 도시들을 지도에 표시하면서 다녀보고 싶었다.

이렇게 내 낭만을 채우기 위해 전국지도를 찾아 공항 여기저기를 헤맸다. 만나는 직원들에게 '치즈'('지도'의 일본어 발음)를 외치며. 상점 서너 군데를 돌고 나서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발견한 서점에서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이제 진짜 모험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열차에 탑승할 무렵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최소 허리춤까지 쌓여있는 눈과 석양을 넋놓고 한참 바라보며 시내로 향했다.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올때 쯤 삿포로 역에 도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5시. 퇴근인파에 북적북적했다. 배고프고 몸도 쑤셨지만 포켓몬 센터가 근처에 있는 걸 보고는 자연스럽게 몸이 그곳으로 향했다. 일본 곳곳의 도시들에는 이런 포켓몬 센터들이 위치해 있어서, 사실 꼭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볼 기회는 충분했다. 하지만 모험의 시작에는 동료가 필요한 법. 이곳에서 내 여행 동료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시간이 더 늦어지기 전에 숙소로 향했다.

삿포로역에서 난보쿠선으로 20분 정도를 더 타고 숙소가 있는 미나미히라기시 역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날은 어두워지고 달이 떠 있었다. 배가 무진장 고팠다. 배낭을 메고 10분 정도를 더 걸어서 게스트하우스 '오야도 삿포로'에 도착했다.

사실 이 숙소는 2박3일에 46,000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금액을 보고 더 고민하지도 않고 예약한 곳이었다. 가격이 너무 싸서 숙소로 가는 길에는 살짝 불안한 감도 있었는데, 도착해서 호스트를 만나자 그런 걱정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작지만 따뜻한 느낌의 라운지에서 여주인장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반갑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나를 맞아주신다. 여기 도착해서 한국말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만나니 당황스러웠다. 체크인을 위한 서류를 쓰고 있는 잠시 대화를 나눴다. 호스트의 성함은 요시에 상. 정겨운 사람이다. 한국말을 놀라울 정도로 잘하신다. 출장으로 한국에 여러번 왔었는데, 한국 문화에 심취해서 나중에는 비수기만 되면 한국을 다녀왔다고 한다. 거의 50번 가까이 한국에 왔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자칭 '코리아 오타쿠'다. 그제서야 라운지의 배경음악이 한국 노래라는 걸 깨달았다.
숙소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굉장히 조용했다. 2층짜리 숙소인데, 규모는 작고, 계단이 많이 삐걱삐걱 거린다. 하지만 관리가 참 잘된 옛날 건물이다. 특히 샤워실이 너무 깔끔해서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작년에 캐나다에 학회 차 출장을 갔을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생각났다. 대마와 오줌이 섞인 냄새가 가득한 샤워실, 바퀴벌레가 나오는 방... 그곳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다.

배정받은 침대에 짐을 흩뿌려 놓고 일단 밥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너무 배가 고파서 어디 식당을 찾아 다니고 싶진 않았다. 길 건너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맥주 한잔하면서 다른 투숙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본인 한명, 한국인 한명이었다. 일본인 친구는 삿포로 시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니세코조라는 곳에서 삿포로로 업무 차 출장을 왔다고 한다. 그곳에서 관광 일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인지 일본 곳곳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쭉 열거하자 본인도 가봤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곳저곳, 정말 많이 추천해줬다. 한국 친구는 나와는 반대로 남쪽에 있는 후쿠오카에서 여행을 시작해 약 3주 정도 걸려서 삿포로까지 도착했다고 한다. 이제 이틀 뒤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이 친구는 누마즈시 근처에 있는 후지산이 잘 보이는 명소를 추천해줬다. 꼭 가봐야지. 요시에 상을 포함한 네 명이서 생맥주(숙소에서 생맥을 판다)를 몇 잔씩 걸치면서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이제 여행이 진짜 시작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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