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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본 전국배낭여행 (2023)

[일본배낭여행 #5-하코다테] 일본 현지인들의 휴양지에서 요양하기

by 구름잡이 2023. 12. 24.
※ 이 글은 2023년에 다녀온 여행을 바탕으로 작성된 기록입니다.

토요일 아침, 하코다테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사실 푹 자진 못했다. 어제 하루 종일 배낭을 메고 이동을 한 탓에 누적된 피로도 있겠지만, 마침 어제 넷플릭스에서 <더 글로리> 시즌 2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딱 한 편만 보고 잔다는 게, 연달아 3~4편을 보고 말았다. 하코다테는 처음이라 여유롭게 1주일 정도 있을 생각으로 큰맘 먹고 호텔로 숙소를 잡았다. 이보다 타이트한 스케줄이었으면 밤에 드라마 보는 시간도 아까웠을 텐데, 이 또한 휴식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나 보다.

그래도 아침에 눈을 뜨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동네 구경을 해보고자 숙소 조식으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길거리로 나왔다. 토요코인 비즈니스 호텔을 잡았는데, 조식으로 간단한 뷔페가 제공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침 식사가 가능한 호텔이 캡슐호텔과 게스트하우스보다 가성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도쿄처럼 숙박비가 비싼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사진은 이래 보여도 꽤나 맛있는 아침이었다.

숙소 바로 옆에 "하코다테 아침 시장"이 있었다. 골목을 들어서니 수산물 가게 사람들이 양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해산물 향이 물씬 나면서, 순간 어디 인천의 수산물 시장에 회 뜨러 온 듯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 시장 건물 안으로는 수산물뿐 아니라 다양한 음식과 과일들이 있었다. 토요일 아침인데도 꽤 한적해서 조용히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다. 크게 감흥은 없었고, 얼른 시내 주변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처럼 배낭도 숙소에 두고 나왔고, 비도 오지 않는 맑은 날씨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다시 시장 골목을 빠져나와 메인 도로를 따라 걸었다. 남쪽으로 쭉 걸어 올라가니 시야에 설산이 자리 잡고 있어 외딴 산골마을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또 조금만 언덕길을 올라가면 그 옆으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조화가 정말 매력적인 동네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홋카이도 하면 삿포로가 먼저 떠올랐지, 하코다테가 바로 생각나진 않았는데, 요 며칠 지내면서 산과 바다가 조화로운 하코다테의 분위기에 반해버렸다. 삿포로에서 만난 칸타군에게 하코다태는 일본 사람들이 휴양지로 선호하는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시야에 산과 바다가 함께 들어오는 매력적인 동네였다

 

조금 엽기적일 수는 있으나, 하코다테에 오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중앙로를 따라 쭉 언덕길을 올라오면, 동네와는 되게 어울리지 않는 노란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하코다테의 상징 중 하나인 旧函館区公会堂(옛 하코다테 공회당)이었다. 1910년에 지어진 이 서양식 건축물은 밝은 노란색과 차분한 하늘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외벽으로, 주변의 전통적 일본풍 주택들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언덕 위에 자리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도 압권이었다. 내부는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옛 느낌을 잘 보존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또 재미있는 점은 이곳이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사건의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는 화려한 외관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미스터리한 사건 전개의 배경이 되는데, 특히 이 건물의 특징이 사건의 트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또는,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추억이 있어서인지 건물 앞에 서자, 그냥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라 익숙한 만화 속 장면이 현실에 겹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흐뭇했다.

언덕을 조금 내려가 광장으로 향하면, 산지가 더 잘 보이는 전망 스폿이 나온다. 포켓몬고 매니아들의 성지이기도 한가 보다.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은 많이 없어서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설산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산과 바다를 동시에 품은 도시'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 뒤 관광버스를 타고 일본사람들이 내리길래 자리를 옮겼다. 일본인들의 관광지라는 게 검증되는 순간이었다. 

절경을 배경으로 포켓몬고 스팟도 있다

북서쪽으로 언덕을 내려오니 바닷가를 따라 고기잡이 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지고, 비릿한 냄새가 묻은 부둣가 풍경은 순간 동해안의 어느 항구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바닷길을 따라 걷다 보니, 몇 블록마다 작은 절들이 자리하고 그 뒤편 산 능선을 따라 묘지가 빼곡히 이어졌다.

하코다테는 개항 도시이자 서양 문화가 일찍 들어온 곳이라, 기독교 묘지·러시아 정교 묘지·불교 묘지가 한 언덕에 공존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인데, 이곳에서는 종교와 문화가 섞여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마저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고룡사"라는 절 입구에 이끌려 들어가니, 언덕 전체가 묘지로 이루어진 ‘무덤 산’이었다. 고요 속에서 바람 소리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묘비들을 스쳐 지나가니, 왠지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죽음이라는 테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적막이 오히려 위안처럼 다가왔다.

능선을 따라 묘들 사이를 오르다 보니 시야가 확 트였고, 아래로는 바다가, 멀리로는 설산이 함께 들어왔다. 언덕 아래엔 영혼들의 안식처가, 저 멀리엔 살아 있는 자연의 장엄함이 대비되면서 묘하게 비현실적인 풍경이 되었다. 잠시 후, 다른 묘역 쪽에서 스님과 가족들이 합송하는 듯한 노랫소리가 바람결에 흘러왔다. 산 위의 정적과 맞물려 마치 ‘죽음의 섬’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이었다.

원래 내가 죽으면 후손들 안 불편하게 어디 뿌려지고 싶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 묻혀서 안식을 찾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능선이 워낙 가파르다보니, 이런 재미있는 표지판도 있었다 (파파고 번역)

하코다테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산과 바다, 죽음과 고요가 겹쳐지는 풍경들로 채워졌다. 아침 시장의 활기에서부터 언덕 위 노란 공회당, 그리고 바닷가와 묘지 언덕의 고요함까지. 삿포로나 오타루에서 느낀 홋카이도의 인상과는 또 다른, 조금은 이방적이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의 시간은 꽤나 편안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