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23년에 다녀온 여행을 바탕으로 작성된 기록입니다.

체크아웃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이런저런 채비를 하기 위해 로비로 내려왔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다음 며칠 간은 삿포로에서 홋카이도 최남단에 위치한 하코다테까지 이동할 계획이었다. 반도의 해안가를 따라 열차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JR패스를 끊었기 때문에 아무 역에서 내려서 천천히 구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하코다테로 가는 길 사이에 가볼만한 곳이 있을까 찾아보는 와중이었다. 그때 마침 온천마을로 유명한 노보리베쓰라는 곳이 눈에 띄었다. 삿포로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삿포로 역에서 호쿠토선을 타고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장소였다. 아직 일본에서 온천을 가보지 못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Booking.com을 열어 오늘 묵을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노보리베쓰 역 바로 앞에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다. 역에서 가깝기도 하고, 1박에 39,000원이라는 착한 가격을 가진 숙소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약을 했다. 이렇게 당일에 숙소를 찾아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잭 리처"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리 차일드의 소설 속 주인공이다. 그는 체크카드와 약간의 현금, 칫솔 만을 가지고 하루하루 발이 이끄는대로 돌아다니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난 짐이 조금 많긴 하지만, 그렇게 즉흥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멋있다. 이번 여행에서 계획을 최소한으로 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발이 이끄는대로 가보자.
숙소 계산과 같이 목돈이 나가는 비용은 전부 카드로 하고, 그 외에 여행하면서 발생하는 금액은 챙겨온 현금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지난 몇일 간 동전이 많이 생겼다. 확실히 일본에서는 현금을 쓸 일이 많았다. 동전은 1엔짜리부터 500엔짜리까지 다양하게 있어서, 잘 관리해둬야 했다. 모이면 은근히 큰 돈이 되었다. 동전을 세고 챙겨온 동전지갑에 잘 챙겨 넣었다 (동전 현황: 1엔 18개, 5엔 3개, 10엔 10개, 50엔 1개, 100엔 3개, 500엔 1개. 다해서 만원 정도 되는 셈이다).

컴퓨터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던 중 로비의 통 유리창 바로 옆으로 차 한대가 끼익하고 들어섰다. 상당히 터프하게 차가 들어와서 당황했다. 운전자가 누군가 하고 살펴보니, 입에 담배를 물고 한손으로 여유롭게 주차를 하는 숙소의 호스트 요시에 상이었다. 눈길 운전을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성수기 때 바짝 일을 하고, 비수기 때에 한국 여행을 다니신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그런 자유로움이 참 좋아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성격이 워낙 좋으셔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많은 인연을 만들어 오신 것 같았다. 숙소의 첫 한국인 게스트들이 며칠 뒤에 다시 놀러올 거라고 하셨다. 그들에게 한국말을 많이 배우셨다고 한다. 배운 말이 무엇이 있냐고 물어보자, 두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대어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면서, "담타?" (담배타임)라고 한 마디 한다.
요시에 상이 주방에서 물을 데워서 모닝 커피와, 빵, 그리고 함께 발라먹을 초콜릿 크림을 대접해 주셨다. 이 초코 크림이 맛있어서 사진까지 찍어뒀다. 요시에 상은 마트에서 "가장 싼 거" 샀다고 내게 고백하며 민망해하셨다. 어제 고속도로 톨비로 적잖이 충격을 먹었던 이야기를 요시에 상에게 말해줬다. 400km 정도 주행했는데, 톨비만 8만원 가까이 낸 것이다. 요시에 상의 말에 따르면 일본 톨비는 정말 비싸서, 현지 사람들도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국도를 이용한다고 한다. 내가 한참 시카리베츠 호수에 대해 이야기 하자 여름에 꼭 다시 와보라고 한다. 어제 찻길을 따라 보였던 눈이 쌓인 들판이 생각났다. 안 그래도 어제 정말 많이 느꼈다. 여긴 여름에도 경치가 장난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름에 오게 되면 조개와 성게를 먹어보라고 하셨다.

한 시간 정도 컴퓨터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요시에 상은 장부를 꺼내 영수증 정리를 하고 계셨다. 종종 그녀의 입에서 '아씨..', '큿소' (일본어로 '젠장'이라는 뜻)가 들려왔다. 게스트하우스 운영하면서 제일 힘든 부분이 숫자 계산이라고 한다. 작은 게스트하우스 운영에 어떤 숫자 계산이 있나 싶어 살짝 봤더니 공과금 계산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일본은 공과금 납부도 아날로그로 한다고 들었던 것 같긴하다. 편의점 가서 낸다고 하던데..
나는 방으로 올라가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방이 너무 무거워 출발 전에 정리를 하고 가려고 마음 먹었다. 챙겨온 삼선 슬리퍼를 버리고 헤어 드라이기를 요시에 상에게 기증했다. 전원 어댑터가 있으니 숙소에서 잘 사용하겠다고 한다. 슬리퍼는 필요하다면 더 가벼운 걸 살 수 있고, 헤어 드라이기는 하다못해 넷카페(피시방) 같은 곳에서도 찾을 수 있어 따로 챙겨다닐 이유가 없었다. 큰 배낭과 작은 배낭을 효율적으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할 때에는 큰 배낭을 등에, 작은 배낭을 앞으로 메고 다녔는데, 그러면 너무 기동성이 떨어져서 불편했다. 그래서 큰 배낭 위에다가 작은 배낭을 얹어서 어깨 끈으로 두 가방을 결합했다. 그 뒤에 큰 배낭의 방수 커버를 덮어서 두개의 가방을 고정시켰다. 이렇게 하니 가방 두개를 전부 등에 멜 수 있어 훨씬 편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방이 가벼워진 느낌은 크게 없었지만 부피가 줄어 더 편했다.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날이 따뜻해질테니, 나중에는 옷을 버려서 짐을 조금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짐정리가 어느정도 끝나자 건너편 침대에서 묵었던 한국인 친구도 체크아웃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친구는 몇 주간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이제 한국으로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배낭 대신 캐리어를 끌고 왔더라. 열차로만 이동할 거면 캐리어도 편했을텐데, 종종 걸어다닐 일이 많아서 불편했다고 한다. 둘이 함께 삿포로 역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요시에 상과도 작별인사를 했다. 게스트가 떠나기 전에 사진을 찍어 숙소 인스타그램에 올리는데, 우리에게도 사진 촬영을 부탁하셨다. 호스트의 인간미가 다시 한번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다음에 다시 삿포로 여행을 오게 되면 또 방문하겠다는 말과 함께 숙소를 나왔다.

10시 반 정도에 스스키노 역에 도착했다. 둘이서 점심식사할 곳을 찾는데, 아직 오픈한 식당이 많지 않아 한참 돌아다녔다. 식당을 찾다보니 어느샌가 스스키노 역에서 삿포로 역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친구는 여행 내내 라멘을 먹어 마지막으로 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 했는데, 결국 돌고 돌다 어느 백화점의 푸드코트에서 라멘집이 오픈한 걸 발견했다. 결국은 라멘을 먹었다. 내 입장에서는 일본에 도착해서 먹는 첫 라멘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먹는 라멘 맛에 익숙해진 것일까, 일본 라멘은 무척이나 짜게 느껴졌다.

친구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JR패스가 있다면 예약석을 확보해 편하게 갈 수 있다. 난 노보리베쓰 행 JR 열차를 예약하고 앉아서 열차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열차자 연착 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일본어 안내문 밑에 한국어로 내용이 번역되어 있었다. "도시 붕괴의 영향으로 인해 하코다테 방면의 열차가 지연되었습니다". 아마 이 지역은 눈으로 인해 산사태가 종종 발생하는 것 같다. '도시 붕괴'라는 번역체가 섬뜩하면서도 웃겼다. 다른 열차들의 지연 사유도 재밌는 게 많았다. 예를 들면, "사슴과 접촉"으로 인해 지연된 열차가 있었다. 접촉이었을까, 충돌이었을까. 결국 나는 열차를 타기 위해 1시간 반을 기다리게 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열차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자,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매우 정중하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셨다. 알고보니 내가 열차 칸을 헷갈려 다른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사과드리고 내 자리를 찾아 왔다. 처음 타는 예약석이라 표를 읽는 법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3시가 다 되어 노보리베쓰 역에 도착했다. 역전으로 나오니 시골마을의 터미널 광장 같은 모습이었다. 80~90년대로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알고 보니 온천마을은 역에서 버스를 타고 산길로 20분 정도 더 올라가야 했다. 그래서 이곳은 상대적으로 관광지 느낌이 없는 시골 동네였던 것이다. 내가 잡은 숙소는 광장 바로 근처에 위치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자 넓은 로비에 직원이 2명 있었다. 여자 직원이 영어가 어려운지 머뭇거리다가 옆에 있던 남자 직원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남자 직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숙소 안내를 받는다. 일본 와서 2번째 숙소인데(그것도 하룻밤 4만원 이하로!), 퀄리티에 다시 한번 놀랐다. 굉장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가성비가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아니면 슬슬 비수기라 그런 것이었을까?
시간이 늦어져서 짐만 던져 놓고 온천마을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숙소 밖으로 나왔다. 이슬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고 나온 배낭에 우산이 있긴 한데, 다시 가지러 가기에는 많지 않은 비였다. 얼마 기다리자 아까 내렸던 기차역 방향에서 버스가 왔다. 미리 준비해둔 동전을 손에 들고 앞문으로 타려고 하는데, 버스 기사가 뒤로 타라는 시늉을 한다. 버스를 뒤로 타라고? 뒷문으로 올라타자 티켓을 뽑는 기계가 있었다. 일본 버스 대부분은 후불 결제였다. 그래서 하차할 때 요금계산을 편하게 하기 위해 앞문으로 내리는 것 같았다. 눈치껏 다른 승객들을 살펴보니, 내릴 때 앞문 쪽에 티켓을 제출하고, 자신이 이동한 거리만큼 요금을 지불하는 것 같았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15분 정도 버스를 타고 계곡 안쪽에 도착했다. 요금은 350엔 나왔다.

아까보다 비가 많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통통 튀는 싸락눈으로 바뀌었다. 안개도 많이 꼈다. 버스 정류장을 벗어나 마을 안쪽으로 더 올라갔다. 높은 곳으로 올라와서 그럴까, 아까보다 체감 상 더 추웠다. 호텔들 대부분이 이쪽에 몰려 있는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 쪽보다 더 북적북적 거리고, 규모가 큰 호텔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다 온천이 있는 호텔들이었다.
언덕길을 올라가자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유황 냄새와 안개의 조합이 굉장히 묘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지옥계곡'이라는 별명답게 도깨비 형상들이 방문객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진짜 산신령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곳이었다. 지옥계곡을 따라 트래킹 코스가 나있었다. 비가 오니 분위기가 더 좋았다.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자욱한 수증기, 조로록 조로록 물이 흐르는 소리, 목욕탕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유황 냄새... 오감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예상 외로 관광객이 많았던 것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관광버스들이 수십대가 서 있었다. 여기저기서 한국말도 들려왔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다 보니 이해는 되면서도, 솔로 여행객 입장에서는 살짝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산 깊숙이 들어가 보고 싶었다. 관광지역인 지옥계곡 뒤로 산길이 나 있는데, 지도 상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천연족탕이 있었다. 산 골짜기에서 따뜻한 물에 족욕이라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벌써 해가 지고 있어서 헤맬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바로 근처에 보이는 기념품 센터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살짝 민망해졌다. 몸은 이미 비에 젖어버린 상태였다. 안경도 김이 서려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과 비에 젖어 미끌미끌한 신발을 이끌고 손님들을 지나쳐 점원에게 가서 휴대폰을 보여주며 족탕의 위치를 물었다. 점원 아주머니는 관광객용 지도를 꺼내 연필로 가는 길을 친절히 표시해 주셨다. 아까 걸어 올라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산 위로 올라가는 다른 길이 있었다. 연필로 그 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그려주셨다. 목적지는 지도 맨위 끝 쪽에 있었다. 도보로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또 불빛이 전혀 없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해주셨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왔던 입구로 다시 나가려고 하자 나를 잡으시고는 계산대 뒤로 난 직원용 문으로 나가라고 안내해주셨다. 젖은 내가 불쌍했던 걸까, 바닥 걸레질을 또 하기 번거로우셨던 걸까. 마지막으로 '간바레' (일본어로 '화이팅'이랑 비슷한 의미)라는 한 마디를 해주셨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발을 더 빨리 움직였다. 5분 정도 왔던 길을 따라 내려가자 파출소가 보였다. 파출소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아까 올라갔던 메인 도로보다 길이 좁아졌다. 크고 작은 숙소들이 길을 따라 나있긴 했지만 관광객이 많이 통하지 않는 길임은 분명했다. 주변이 금방 조용해졌다. 유황 냄새도 조금 전 지옥계곡보다 더 강해졌다고 느꼈다. 옷은 점점 더 젖어갔다. 추웠다. 후리스 안에 후드티까지 젖어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오른쪽에 큰 호텔들이 보였다. 벽이 쳐져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수증기가 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1층에 야외 온천이 있던 것이다. 부러웠다. 다른 호텔의 로비를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 보자 내 또래의 젊은 남자 무리가 유카타를 입고 이동하고 있었다. 온천을 하러 가는 길일까, 이미 다녀와서 맛있는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일까. 괜히 부러워서 손을 한 번 흔들어 본다. 한 녀석이 다시 손을 흔들어준다. 부러웠다. 얼굴이 얼어버린 느낌에 목도 말랐다. 온천에 도착하면 그 물을 마실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족탕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산길을 따라 난 찻길 끝에 도착하자 나무 표지판에 한자로 무엇이라 써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발 족(足)은 알아볼 수 있었다. 거의 다 온건가 싶어서 보니 짧은 다리를 건너 본격적으로 산길이었다. 다만 지도상으로 족탕은 산길 초입에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서부터는 눈이 치워져 있지 않은 길이라 제법 미끄러웠다. 눈과 진흙을 밟으며 10분 정도 더 갔을까? 작은 오두막 옆으로 계곡을 따라 나무판자 길이 나타났다. 판자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자 드디어 족탕이 나타났다.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더 안 쪽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먼저 온 손님이 계셨다. 빨간 패딩을 입은 아저씨였다. 내가 다가오자 일본어로 인사를 해주셨다. 막 족욕을 마치셨는지 양말을 다시 신고 계셨다. 물이 뜨겁냐고 물어보자 따끈하다고 답해주셨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시길래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웰컴 투 재팬'이라고 말해주셨다. 아저씨는 떠날 채비를 하시고, 나는 신발을 벗고 있는 중에 짧게나마 대화를 했다. 출발 전에 연습해온 문장 몇 개를 처음으로 써먹어 봤다. "저는 대학원생입니다. 졸업 여행 중입니다. 일본 전국 여행 중입니다. 홋카이도에서 큐슈지방까지 갑니다." 외워온 문장들을 전부 소진했다. 그 뒤로는 둘이서 짧은 영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떠나시기 전에 뭐라고 일본어로 말씀을 하셨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웃었다. 그리고 아저씨는 자리를 비켜주셨다. 나도 한국어로 '안녕히가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아저씨가 떠나고 드디어 발을 담궈봤다. 미지근했다. 겨울인 건 감안하더라도 그래도 어느정도 따뜻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미지근해서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괜찮았다. 자연 한 가운데에 혼자 놓여 목욕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은은한 유황 냄새를 맡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멍때리고 명상하기 좋은 곳이었다. 몇 분 정도 혼자 가만히 앉아 고요함을 즐겼다.

몇 분 정도 지났을까, 다음 손님이 왔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였다. 조금 전의 아저씨가 그랬듯이 이번엔 내가 양보해줄 차례였다. 아쉽지만 자리를 비켜주고 다시 산길을 내려왔다. 아직 시간이 많이 늦지는 않아서 근처에서 온천을 하고 싶어졌다. 구글지도로 찾아보니 공중탕들은 영업이 종료된 곳이 조금 있었다. 호텔 온천을 몇 군데 알아봤다. 경우에 따라서는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온천을 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고 하여 찾아가봤다. 처음 찾아간 호텔에서는 'stay-only' (투숙객 전용)라며 거부 당했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더 내려갔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처음 봤던 몇 개의 호텔 중 하나를 들어가 다시 물어봤다. 'onsen-only' (온천만 이용)가 가능하다고 했다. 조금 비싼 감은 있지만 2,000엔을 지불하고 온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후회는 없었다. 지금껏 얼어있던 몸이 녹는 기분이었다. 탕이 6개 정도 있는 꽤나 규모 있는 온천이었다. 만족스럽게 몸을 녹이고 나왔다. 여전히 이슬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몸이 따뜻해진 상태라서 시원하게 느껴졌다.
시내로 내려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온천마을을 떠났다. 숙소로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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