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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규슈 로드트립 (2025)

3. 그날, 인류는 떠올렸다. 진격의 거인 성지순례 in 규슈 히타 (feat. NOL 해외숙소예약)

by 구름잡이 2026. 1. 4.

규슈의 히타는 도시라기보다 ‘동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점심식사를 했던 마메다마치 상점가도 저층의 전통 가옥이 양옆으로 늘어선 길로, 교토나 경주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풍겼다. 전반적으로 이 도시는 높은 건물 없이 낮은 지붕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격의 거인 성지순례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상점가에서 남쪽으로 20분 정도 걸어 내려와 히타시의 대표 기차역인 히타역으로 향했다. 역 광장에는 리바이 병장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된 이 동상은 이제 히타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히타는 <진격의 거인>의 원작자 이사야마 하지메의 고향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산과 강, 댐으로 둘러싸인 풍경 속에서 자랐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높고 거대한 벽에 둘러싸인 풍경”이 작품 세계관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히타 인근의 산악 지형과 댐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라는 설정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소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마을 부흥회’라는 이름의 건물들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의 출산율은 1970년대부터 이미 꺾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구 소멸을 우리보다 먼저 겪은 일본은, 인구 자연감소를 관광객 등 외부 유입인구로 대체하기 위해 지자체 주도로 다양한 실험을 이어오고 있다. 히타 역시 지역 출신의 유명 만화가라는 자산을 활용해 관광과 지역 경제를 연결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마을 곳곳에는 진격의 거인 콘셉트로 꾸며진 공간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과하게 상업적인 느낌보다는, 동네 분위기 속에 조용히 스며든 인상이 강했다. 히타의 진격의 거인 성지순례가 특히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이곳이 단순히 ‘콘텐츠를 소비하는 관광지’가 아니라 콘텐츠가 지역의 일상 안으로 스며든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술할) 캐릭터 동상과 박물관, 카페와 기념품점은 분명 관광 요소지만, 그 동선은 주민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역, 시장, 마트와 겹쳐 있다. 관광객은 의식하지 않아도 지역 공간을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역 상점과 생활권을 소비하게 된다. 과도한 테마파크식 연출이 아닌, 작품의 세계관을 ‘해석 가능한 배경’ 정도로만 남겨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편안한 결합’은 결국 히타의 성지 관광은 팬을 끌어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체류·소비·재방문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조용한 소도시가 긴 시간 동안 이 콘텐츠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역으로 가는 길에 먼저 ‘진격의 거인 히타 카페’를 만났다. 진격의 거인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카페 겸 매장이었다.

진격의 거인 카페. 가장 유명한 첫 장면이 대형 사이즈로 전시되어 있다.
도시 곳곳에 주요 랜드마크에서 진격의 거인 도장을 찍을 수 있다.
조사병단 대원복. 퀄리티가 살짝 아쉬워 구입하진 않았다.

 

..예쁘다

바로 옆은 히타역 광장이었고, 조용한 광장 한켠에 우리가 찾던 리바이 병장의 동상이 서 있었다. 

히타역 광장에 위치한 리바이 병장의 동상.

역 내부의 인포메이션 센터 역시 만화책 콘셉트로 꾸며져 있어, 이 도시가 작품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단번에 보여준다.

 

히타역의 인포센터 내부.
마을 곳곳이 진격의 거인 캐릭터로 꾸며져 있다.

다음 행선지는 히타의 대표적인 진격의 거인 박물관 중 한 곳이었다.

도시 중심부에서 약 10km 떨어진 산속, 오야마강을 따라 난 국도 한가운데 위치한 Shingekinokyojin in HITA Museum. 바로 옆에는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작은 시장이 붙어 있었다. 알고 보니 이 일대는 이사야마 하지메가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가던 장소라고 한다.

 

특히 근처의 오야마댐은 진격의 거인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인 ‘월 마리아’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된 곳이다. 거인들이 지배하는 외부 세계와 인간이 살아가는 내부 세계를 가르는 거대한 벽. 실제로 댐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그 설정이 단번에 이해될 만큼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Shingekinokyojin in HITA Museum 입구.
박물관의 내부 입구. 티켓을 사면 다른 박물관도 출입이 가능하다.

박물관 내부에는 애니메이션 피규어뿐 아니라, 작가가 초기 스토리를 구상하던 노트와 습작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실존하는 장소가 어떻게 작품에 영향을 주고, 그 모티프가 어떻게 21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세계관으로 확장되어 갔는지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내부
박물관 내부
작가가 스토리를 구상하던 노트를 전시해두었다.
작가의 작업실을 재현해두었다.

관람 동선을 따라 나오면 자연스럽게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마켓으로 이어진다. 진격의 거인 콘셉트 상품과 함께 지역 특산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박물관의 몰입감 있는 분위기에서 갑자기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관광객의 소비가 자연스럽게 지역으로 연결되도록 설계된 구조라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삿포로x진격거 콜라보

다음으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오야마댐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산 안쪽으로 7분 정도 더 들어가면, 댐 하단부에서 위를 올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 도착한다.

오야마댐은 산과 산 사이에 숨겨진 듯한 장소였다. 차를 타고 오야마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변에는 인공적인 구조물보다 숲과 계곡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댐은 그 자연 한가운데를 가로막듯 서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오야마댐은 높이와 폭 모두에서 압도적이었다. 물과 산, 그리고 인간이 만든 벽이 맞닿아 있는 이 지점에서, 왜 이곳이 진격의 거인 세계관의 출발점이 되었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면 보이는 오야마댐의 모습

이곳이 바로 진격의 거인 첫 장면에 영감을 준 장소다. 거대한 벽 위로 언제든 초대형 거인의 손과 얼굴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댐 아래에는 에렌, 미카사, 아르민 3인방의 동상이 멍하니 벽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작가의 어린시절 상상력을 체험해보고 있다.
작가의 사인이 보인다.
댐의 높이는 94미터 정도. 실제로는 초대형거인(60미터)보다 더 크다.

고개를 들어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댐 위를 사람들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찾아보니 상부 전망대가 따로 있었다.

댐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또 달랐다. 반대편에는 물이 가득 찬 저수지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산자락이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관광객만 없다면, 정말 인류가 멸망한 자연 한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댐 위에서 바라본 반대편 저수지.
끝없이 펼쳐진 골짜기의 모습

이 풍경이 너무 인상 깊어서, 공항으로 돌아가기 전날 아침에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았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일정으로 또 하나의 박물관을 방문했다. Attack on Titan in HITA Museum ANNEX.

이곳은 앞서 방문한 박물관과 달리, 원작 만화에 더욱 충실한 구성이다. 단행본 1권부터 34권까지의 명장면 원고가 크게 전시되어 있고, 각 장면마다 작가의 코멘트가 덧붙어 있다. 한 권씩 천천히 따라가며 읽다 보면, 작품을 다시 처음부터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작가가 어린시절 그렸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단행본별 명장면들의 원고와 작가의 코멘트를 전시해두었다.

 

당신의 최애캐는?
뭔가 괴랄하다?
작가의 유머러스한 코멘트들이 남겨져 있다.
코멘트를 읽다보면 작품의 철학이 확연히 드러난다.
어김없이 기념품 매장!

 

성지순례 일정을 마치고, 회사 복지포인트로 받은 NOL 포인트로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이번 숙소는 온천이 있는 호텔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미쿠마강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해 질 무렵, 밖에 나와 강가를 바라보았다. 물결이 저녁빛을 받아 색이 바뀌는 과정이 요란하지 않아서 좋았다. 도시의 화려함 대신, 시골 동네의 조용한 저녁 시간이 너무 좋았다. 확실히 시골이라 금방 주변이 어두워졌다.  객실로 돌아와 창을 열어두니 시원한 밤공기가 서서히 들어왔다.

숙소 테라스에서 보이는 마을의 모습.

무지를 비롯한 대형 쇼핑몰이 바로 옆에 있어 저녁거리를 사 들고 호텔로 들어왔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조용한 히타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조용한 소도시 특유의 온도와 강가 풍경, 그리고 적당히 오래된 온천 시설까지. 히타의 1박은 여행의 속도를 확실히 늦춰주는 시간이었다. 규슈 여행 중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준 곳이기도 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