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센도 역참마을] 여행은 결과가 아닌 과정
나고야에 도착한 날 저녁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하긴 지난주부터 계속 비였다.

이럴 때는 캐리어를 끄는 것보다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편했다. 무엇보다 두 손이 자유롭다는 게 좋았다.
일본 중부지방, 이른바 주부지방을 본격적으로 돌아보기 위해 거점 도시인 나고야로 향했다. 시즈오카에서 열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이동했다.
가는 열차 안에서는 친구도 한 명 사귀었다. 신칸센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덴마크 사람이었다. 내가 맥북으로 영상 작업을 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이는 나보다 세네 살 정도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스톡 푸티지(stock footage), 그러니까 광고나 방송 등에 활용되는 상업용 영상을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열차에는 큼직한 캐리어 두 개를 들고 탔는데, 하나에는 옷이, 다른 하나에는 촬영 장비가 가득 들어 있었다.
세계를 여행하며 촬영한 고품질 영상을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판매 수익을 얻는 프리랜서 영상 제작자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다음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다시 새로운 여행지로 떠나 영상을 촬영하며 돈을 번다고 했다. 그는 다음 촬영을 위해 나고야를 거쳐 오사카로 향하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누군가를 그렇게 부러워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일본에 체류하며 다시 만나 같이 놀기도 했다. 이 친구와의 인연은 언젠가 별도의 포스트로 남겨보려 한다.
일본 중부지방은 이름 그대로 일본 본토의 중앙부에 자리한 지역이다. 서쪽으로는 오사카와 교토가 있는 간사이 지방이, 동쪽으로는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 지방이 이어진다. 일본 열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산악지대와 남북의 바다가 함께 어우러져 있어, 지형적으로도 여러모로 흥미로운 곳이다.
특히 이 지역은 에도시대에 에도와 옛 수도 교토를 연결했던 길, 나카센도(中山道)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카센도는 도카이도와 함께 두 도시를 잇던 주요 간선도로였다. 다만 남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도카이도와 달리, 나카센도는 일본 중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관통했다.
길 위에는 모두 69개의 역참이 설치되어 있었고, 다이묘와 관리, 상인과 순례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이 길을 오갔다. 오늘날에도 기소 계곡을 중심으로 옛길과 마을 일부가 남아 있어, 수백 년 전 사람들이 걸었던 산길을 직접 따라가 볼 수 있다. 길 곳곳에는 당시 사람들이 교토와 에도를 오가며 쉬어가던 역참마을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보존되어 있다.
마음만큼은 늘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표방하는 나로서는 이 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비는 잔뜩 쏟아지고 있었지만, 수백 년 전의 나그네에 빙의해 우비를 둘러쓰고 이 길을 따라 산속의 역참마을까지 걸어가 보고 싶었다.
다음 날. 여행의 출발지로 나고야에서 열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나카쓰가와 역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오늘의 목적지인 마고메주쿠라는 역참마을까지 8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흥미로운건 고도로 약 300m 이상을 올라가야 했다.

전날부터 이어진 비는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고, 산 쪽으로 갈수록 구름은 점점 낮아졌다. 평소라면 여행하기 좋지 않은 날씨였겠지만, 오래된 산길과 역참마을을 찾아가는 날만큼은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했다.
나카쓰가와에 도착한 뒤에는 역 근처 편의점에서 우비를 샀다. 작은 배낭을 챙겨왔는데, 따로 방수 커버가 없어서 가방을 메고 그 위에 우비를 입었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역에서 벗어나자 금세 도시의 흔적이 옅어졌다. 도로 양옆으로 집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고, 그 너머로는 비구름에 가려진 산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비 오는 일본의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민가와 논밭 사이를 지나갔다. 하지만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점차 산 쪽으로 향했고, 주변의 초록은 한층 짙어졌다. 빗물이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흘렀고, 산에서는 옅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도상으로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비를 맞으며 걷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거기다 맞바람이 세게 불어서 고생을 조금 했다. 우비를 입었어도 소매와 바짓단은 조금씩 젖어갔고, 배낭의 무게도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청바지를 입고 왔다. 가끔씩 차가 옆을 지나갔지만, 걸어가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하게 됐다.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을 두고, 굳이 비를 맞으며 산속의 오래된 마을을 찾아 걷고 있었다. 여행이란 종종 목적지보다도 그곳까지 가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가는 길에는 숲속의 돌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러다 버려진지 수십년은 되어 보이는 주막 같은 건물을 발견했다. 아마 수십년 전까지도 나 같이 무모하게 걸어다니는 현대판 나그네들을 위한 쉼터였으리라.

비에 젖은 나무와 돌에서는 짙은 색이 배어 나왔다. 맑은 날이었다면 보기 어려웠을 풍경이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마침내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의 중심에는 돌이 깔린 비탈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 양옆으로 전통적인 목조 가옥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처마 끝에서는 빗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고, 길 사이의 수로에는 맑은 물이 빠르게 흘렀다. 현대적인 간판과 시설이 일부 보이기는 했지만, 마을 전체의 윤곽은 오래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안개였다. 산 위에 자리한 마을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고, 돌길의 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뿌연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마을 전체가 산속에 숨겨져 있는 듯했다. 말 그대로 안개마을이었다.

비 때문인지 거리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천천히 돌길을 오르며 건물 하나하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정자가 보이면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 수백 년 전 이 길을 지나던 사람들도 비가 오는 날이면 젖은 짚신을 끌고 이 비탈을 올랐을 것이다. 그들 역시 이곳에서 잠시 몸을 녹이고, 다음 여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나그네와 내 여행을 그대로 비교할 수는 없다. 나는 500엔짜리 우비를 입고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걷고 있었고, 힘들면 언제든 관광버스를 타고 도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도 같은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과거의 시간이 조금은 가까워진 듯했다. 명상하는 기분도 들었다.
마고메주쿠의 돌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마을을 구경한다기보다는 산길을 따라 조금씩 올라가는 느낌에 가까웠다. 비에 젖은 돌바닥은 미끄러웠지만, 그 덕분에 돌과 목조 건물의 색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마고메주쿠(馬籠宿)라는 이름은 말이 넘어갈 수 없을만큼 길이 험해 말을 두고갔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맑은 날의 마고메주쿠가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만난 이 마을은 비와 안개 속에 있어야 가장 잘 어울리는 곳처럼 보였다.
돌이켜보면 마고메주쿠까지 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마을 중심부에 도착하니 버스가 수시로 그곳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편한 이동수단을 이용해 곧장 마을 앞에 도착했다면, 그곳이 지금처럼 기억에 남았을지는 모르겠다.
몇 킬로미터에 불과한 길이었지만, 빗속에서 직접 걸어 도착한 덕분에 마고메주쿠는 단순히 스쳐간 관광지가 아니라, 어렵게 찾아낸 오아시스 같은 쉼터로 기억될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안개 속에 숨겨진 에도시대의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소바집부터 찾았다. 몇 시간 동안 비바람을 맞은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무엇보다 그동안의 오랜(?) 여정을 따뜻한 음식 한 그릇으로 보상받고 싶었다.
이곳에서 먹은 소바는 지금도 내가 먹어본 소바 중 가장 따뜻하고 맛있었던 한 그릇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비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길가의 수로에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레방아도 불어난 물살을 받아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안개와 목조 가옥, 젖은 돌길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물레방아까지 돌아가고 있으니, 마을 전체가 오래된 풍경화처럼 보였다.



마을 북쪽 끝자락까지 올라가자 돌길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고 다시 산속으로 이어졌다.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다음 역참마을인 쓰마고주쿠에 닿고, 그 너머로도 나카센도는 계속 이어진다. 내가 걸어온 8킬로미터는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옛길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카센도를 따라 역참마을 마고메주쿠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던 그날은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도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종종 그날의 산길과 안개 낀 마을이 떠오른다. 편한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간, 비효율적이지만 무척이나 즐거웠던 나만의 작은 모험이었다.